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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소개 > 지명유래

의령읍 서신(西新)마을

작성자
의령읍
작성일
2749
등록일
2003.08.06
읍면
의령읍
첨부

서신(西新)마을은 법정동리상 서동리(西洞里)로 서본(西本)과 서부(西部)등 세 마을로 나누어져 있어서 행정구역상 명칭이 혼란스럽기도 하다. 예전에는 읍내 들머리 새터동네라거나 새터굼티(굼티, 굼티기, 굼턱이란 말은 지역 토박이말로서 「구석진 곳」「쑥 들어 앉은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굼티, 밭굼티 등 아직도 많이 쓰이고 있는 말이다)라고 불렀던 동네이다. 그 뒤 한자지명을 정하면서 군조례상 행정동리 서동의 서(西)와 신기의 신(新)을 따 붙여서 서신마을로 한 것이다. 가례면지역과 접경을 이루는 곳이고 동네 앞 들가운데에 큰바위(지석(支石), 고인돌) 7개가 있었기 때문에 칠성바구(칠성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칠석바구모팅이 (모퉁이)란 지명도 있었다. 산굽이를 따라서 옛길이 있었고 조금 아래쪽 산코승이 지점에는 새또랑물과 수양버들이 몇 그루 있었고 주막 몇 집이 있었기 때문에 새터주막이니 칠성바구모팅이 수양버들 주막집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주차장자리는 산줄기를 끊어내고 들어낸 터이며 육백사기름집 부근은 약간 높은 둔덕을 이룬 곳이었다. 이 부근에도 초라한 민가가 몇 집 있었는데 주로 대나무를 이용해서 소고리(소쿠리)나 바구리(바구니), 챙이(키)등 생활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뜸을 소고리쟁이집껄로 불렀다. 서산밑 구름들에서 칠성바구모팅이를 돌아서 내삼동(동, 서, 중동 ; 의령 읍내 중심지를 이르는 말)으로 흐르면서 생활용수와 농용수로 쓰던 잠내도 이젠 도로변의 하수구로 변해 버렸다. 의령교회 밑에는 약 1억년전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화석빗자국(소낙비가 쏟아진 자국이 그대로 화석으로 변해진 것을 말함) 이 196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돼 있다. 이 화석은 해안지대에서 발견되는 새발자국, 공룡발자국 등과 같이 아주 희귀한 기념물이라고 한다. 또 바로 옆에 전주사신공관희시혜비(前主事申公寬禧施惠碑)가 서 있는데 이는 평소 어려운 동민들에게 자기 재물을 희사하는 등 지역을 위해서 봉사를 많이 한 분이라 상동 동민들이 세운 송덕비다. 그리고 둑수골과 우수골에서 흘러 내려온 산줄기를 「새주공먼당」이라고 부른다. 이 산줄기 끝을 끊어서 들어내고 대지를 만들어 새동네를 이루고 있으며 버스정류장을 비롯하여 주택과 건물이 많이 들어앉아 있다. 산줄기따라 깊은 골짜기가 한참 이어지는 곳을 둑수골과 우수골이라 부르고 있다. 우수골에는 자그마한 소류지(우수골못)가 있고 소류지 옆길을 따라 걸으면 인근 상동마을과 만나게 되는데 이 길은 웰빙시대 읍민들의 아침운동 코스로 인기가 있다. 못 조금 위에 남향받이로 앉은 산줄기의 중턱에는 우리고장의 자랑할 인물이자 항일투사이면서 한글운동에 평생을 바치신 남저(南樗) 이우석(□祐植)선생님 내외분의 묘소가 있다. 그래서 흔히 이부재메(이부자의 묘)가 있는 우수골산으로 부르고 있다. 공동묘지가 있고 수양버들 주막집, 칠성바구모팅이, 소고리쟁이집 등 새터와 관련된 지명은 이제 아는 이가 드물다.

빗자국 화석 〈천연기념물제196호 (1967년)〉

지금으로부터 약 1억년전에 형성된 화석이다. 지층군의 사암(모래가 물속에 갈아 않아 굳어진 바위를 말함)이 퇴적구조로 보존되어온 이 빗자국은 혹심한 가뭄 때문에 호수의 물이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을 때 그 바닥에 쌓여 있는 부드러운 퇴적물 위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빗방울 떨어진 곳이 조금 패이면서 생긴 자국이다. 그리고 퇴적물의 표면이 마르는 과정에서 다시 또 새로운 퇴적물이 쌓이면서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층(자갈, 모래, 진흙, 생물체 등이 물밑이나 지표에 퇴적하여 이루어진 층)이 굳어져서 돌(바위)로 변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주 희귀한 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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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 의령읍 총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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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01-18